미국에서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전성기를 거쳐 고비를 겪는 모습까지 그의 인생 전반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었다. 그의 친구의 이야기에서부터, 아내와 먼 친척들의 이야기, 거기에 FBI 문서까지(!) 엄청난 자료 수집과 편집을 거친 정성을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노력을 들여서까지 그에 대한 전기가 작성되었다는 것은 그가 미국 역사에서 얼마나 굵직한 업적을 남겼는지 짐작하게 한다.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의 후손 3세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부유한 집안의 아버지와 예술 쪽에서 종사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악기면 악기, 예술이면 예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 할 수 있었던 자유로운 삶을 살았는데 심지어 언어도 잘했다.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등… 진짜 엄친아 그 자체였다…

(p.105) 그는 과학 분야에서는 오펜하이머의 맞수가 될 수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문학, 철학, 심지어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전혀 대응할 수가 없었다.

(p.110) 사람들 말로는 당신이 물리학 연구를 할 뿐만 아니라 시도 쓴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두 자기 모두 할 수 있지요? 물리학에서 우리는 아무도 몰랐던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일을 합니다. 시작의 경우는 반대 아닌가요?

머리도 비상했는데, 남들이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려고 아둥바둥할 때 3학년 안에 끝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another level은 이런 데 붙이라고 있는 말일 것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은 물리학으로 간 진정한 자연과학 lover💕

(p.51) 나는 화학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화학은 물질의 본질을 다루는 학문으로,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일반적인 이론 사이의 관계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물리학에서도 물론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란 훨씬 어렵지요.

(p.66) 하버드에서의 첫 해가 끝날 무렵 오펜하이머는 화학을 전공하기로 선택한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화학에서 좋아하던 것들이 사실은 물리학에 더 가까운 것들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릴 때 Etical Culture School에서의 배움은 그가 삶을 살아가면서 곳곳에 영향을 끼쳤다.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토론을 매우 강조했던 학교였는데, 추후 그가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여러 결정들을 결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책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치부(?)도 나와있는데, 언변술이 뛰어났던 그이기에 여러 여성들을 매력으로 홀리게 만들었다. (진짜… 하나만 잘해ㅜㅜ 왜 다 잘하고 난리야!)

(p.261) 오펜하이머가 다른 남자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사실에 몇몇 친구들은 아연실색했다. 오펜하이머는 바람둥이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에게 강하게 끌리는 남자였다. 그는 키티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내가 곧 원자폭탄이오!

러더퍼드와 보른, 페르미, 디랙, 파인만 등등… 진짜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의 이름이 나오니까 재미있다. 그 당시는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패러다임의 교체가 일어나던 시기였기에 현대 물리학에서 들어본 학자들의 대부분이 등장한다. 그들로부터 직접 현재 진행형으로 말을 듣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마치 나도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p.345) 만약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독일인들이 경주에서 이미 앞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모두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시카고에서 우울한 분위기를 낳은 반면, 오펜하이머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를 받던 로스앨러모스에서는 작업을 빨리 진척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p.501) 오늘 그 자부심은 깊은 우려와 함께해야 합니다. 원자 폭탄이 무기고의 신무기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인류가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의 이름을 저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미국 현대사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다보니 역사에 관한 내용은 어렵게 느껴졌다. 특히 미국의 정치 부분이 어려웠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후대 대통령 트랄린의 정치 성향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려니까 행동이 납득되지 않다가 나중에서야 “아 그래서!” 라며 자꾸만 뒷북치게 된다. 일례로 매카시즘 (=미국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 상원 의원인 매카시로부터 비롯됨)이 있다.

(p.245)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끈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중 한명이지만, 폭탄의 위력을 체감한 뒤에 그는 자기반성과 후회 표출한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스스로 세계를 파괴할 위력의 무기를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보다 이 책에서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장면은 거의 비중 없이 짧게 지나간다. 거의 한페이지에 짤막하게 등장하고 나머지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까지의 오펜하이머의 주변인들과의 관계와 그 이후 그에게 닥치게 될 정치적 위협들이 대부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p.531) 오펜하이머의 걱정거리는 대규모 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는 핵 테러에 대해서도 근심했다. (중략) 서너 명이 뉴욕으로 (원자) 폭탄을 몰래 가지고 들어와 도시 전체를 폭파시킬 수 있지 않을지 (중략) 핵 테러리즘에 대한 방어책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세계적인 무기 경쟁, 특히 너도나도 원자폭탄 개발에 몰두하는 미래를 걱정하는 오펜하이머의 우려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은 현실이 되었고,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더더욱 강한 무기를 만들어 상대방을 위협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통제를 통해서 더 이상 핵무기 개발을 제도로 금지할 것인가?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 사이의 냉전이 지속될 당시에, 일본에서 보여준 핵무기의 처참함을 목적하고도 원자력을 이용한 무기들은 지속해서 개발되고 있었고, 결국엔 소련과 미국 모두 그 힘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국의 실제 무기 보유량이나 개발 진척도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에서 그들은 일종의 핵 치킨게임을 시작했다. 서로 더 많은 양을 보유하려 했고, 더 나아가 핵융합을 응용한 수소 폭탄의 개발까지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은 그런 미국 국방부의 움직임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펼쳤다.

(p.634) 우리는 (수소 폭탄을 개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하느니 차라리 전쟁에서 패배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p.635) 하지만 그것을 갖게 되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오펜하이머는 여러 정치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일관된 주장을 해나갔다. 계속해서 원자력 무기들을 늘려나가고 수소 폭탄을 개발하고자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서 더 강력한 무기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며, 우리에게 닥칠 위험성만 높이는 일이다는 논리를 펼친다.

한편 그는 동시에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일본의 두 도시를 황폐화시킨 원자폭탄들 개발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사람이면서, 그 책임을 완전히 지지 않으면서 새로 개발될 수소 폭탄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것이 자기 모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핵폭탄의 실제 위력을 본 뒤에 스스로 반성했던 그였지만,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큰 적을 만드는 시대적 배경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의 인생의 내리막길

(p.701)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

스트라우스와 오펜하이머의 갈등, 그리고 정치적 적으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라는 세계는 정말 복잡하고 한순간에 모든 게 망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정치적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렇게 집요하게 오피를 반미세력으로 몰고, 대통령을 설득해서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모습에 구역질나기도 했다. 정치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명석하고 인지도가 높은 오펜하이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계 속에서는 그저 단 한명의 시민에 불과했던 것이다. 스트라우스의 오펜하이머에 대한 반감은 다음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p.715) 가까운 미래에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오펜하이머를 완벽하게 축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청문회에서 롭이 오펜하이머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장면을 읽으면서 읽는 나조차도 피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드러내 가면서 질문하면서 의도적으로 오펜하이머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으며, 인격 자체도 붕괴시켰다. 내가 그의 입장에 처해있었다면 화병나서 몇 일 앓아누웠을 것 같다…

(p.797) 라비의 말 : “오펜하이머 박사의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한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는 자문역이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그로부터 자문을 받기 싫다면 자문을 받니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 업적을 이룬 결과가 청문회에 끌려 나오는 것이라니, 참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오펜하이머를 믿어주는 동료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위로가 될까?

(p.829) 부시는 핵무기에 점점 더 의존하는 워싱턴의 정책에 비판적인 오펜하이머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었다. (중략) 그(=오펜하이머)의 동료들은 그가 용기와 애국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다.

오펜하이머 결국 만료 1일 전에 비밀 취급 인가 취소되었다…ㅜㅜ

(p.863) 하지만 어느 날 케네디 대통령이 사람을 달레 보내겠다고 한 약속으로 화제가 돌자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달에 가고 싶나요?” 오펜하이머는 “글쎄요, 그곳으로 보내고 싶은 사람들은 몇 명 있긴 한데” 라고 대답했다.

너무 뼈 있는 말이라 마지막 인용구로 담아보았다. 유머 감각 넘치신 오펜하이머씨. 아마도 몇 명 중에 한 명은 바로 스트라우스가 아닐까? ㅋㅋ


책에 대한 전반적인 후기

현대과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사, 제2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철학적 이해 등 다각도로 이해해야 했던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만큼 오펜하이머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단지 과학 연구 요원의 역할만 수행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과학자의 일생에 대해 알아보면서 21세기의 과학자인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 책임자는 오펜하이머였지만, 결국 큰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원자 폭탄의 위력에 대해서도, 실제로 필요한 폭약의 양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오갔는데, 실험물리학자들의 꼼꼼한 연구 끝에 현실에 맞는 값을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조금 더 강해지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찬 일이 아닐까? 그게 반도체 분야일지, 순수화학 분야일지, 개발 분야일지, 아니면 그 외의 분야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저마다 한 명의 “코리안 프로메테우스”이니까.